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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REVIEW/etc.

신형철-거대한 고독, 인간의 지도(『몰락의 에티카』중)

거대한 고독, 인간의 지도 -은희경,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창비, 2007)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

은희경은 하나의 장르다. 19951월의 등단작 이중주에서 20051월에 출간된 장편 비밀과 거짓말에 이르기까지. 이 장르의 생명력은 10여 년간 완강하였다. 지금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삶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었던가를 뒤늦게 깨닫는다. 90년대 중반에 그녀의 소설과 만난 후 우리는 90년대 초반 한국소설이 빠져 있었던 어떤 편향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를 일러 교술 편향서정 편향이라고 부르려 한다. 그녀의 소설은 충분히 지적이었지만 거기에는 소위 지식인 소설의 엄숙과 훈계가 없었다. 읽는 이보다 얼추 반걸음 정도 앞서가는 그녀의 지성은 상쾌했을 뿐 부담스럽지 않았다. 더불어 그녀의 소설은 충분히 문학적이었지만 거기에는 소위 내성(內省) 소설의 정념 과밀 현상이 해소되어 있었다. 한국소설이 으레 운명처럼 끌고 다닌 눅눅한 감상이 탈수된 자리에 그녀가 복권한 것은 통쾌한 산문정신이었다.

냉소위악이 저 장르의 유전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말들에는 그 유전자의 진화과정이 생략돼 있다. 냉소와 위악은 정주하는 정신의 속 편한 포즈가 아니라 끊임없이 약동하는 정신의 어떤 태세다. 한국의 근대화는 절름발이였다. 시스템의 근대화가 심성의 근대화를 너무 앞서갔다. 물질적 기반이 부단히 갱신될 때 의식의 거미줄들은 채 걷히지 못했다. 은희경이 공들여 쓴 소설들은 그 거미줄들을 하나씩 철거하는 의식의 재개발 사업이었다. 허위와 싸우기 위해 냉소가 동원되었고 위선과 싸우기 위해 위악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넓게 말해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것들과의 유연한 격전이었다. 내 안에 나 아닌 그 어떤 것도 들여놓지 않겠다는 부단한 긴장이 그녀의 것이었고, 풍속의 세목들을 저인망으로 훑으면서 끝내 진정성이라는 이타카(Ithaca)’로 귀환하는 자기의식의 여행이 그녀의 방법론이었다.

집단 정치에서 개인 윤리로의 전환이라는 말로 90년대 소설의 차이를 규정할 수 있고, ‘심층 근대화를 위한 각개약진의 시기라는 말로 90년대의 문학사적 의의를 규정할 수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특히 은희경의 소설들은 개인주의적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한 절정”(황종연)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지금 우리는 ‘90년대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개인 각자가 자신의 삶을 결단할 수 있는 선택의 왕국에서만 90년대적인 것은 가능하다. 그것이 착각이었을지언정 당시 우리에게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1997IMF 사태 이후 10년 동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시스템의 변화는 주체를 파괴하고 끝내 적응시킨다. 지금 이 세계가 유일한 세계일지 모른다는 절망, 이제 세계는 전진하지 않는다는 체념이 체화되었다. ‘역사의 종언이 새삼 뼈아픈 실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금 막 상실을 겪은 사람은 자신의 삶이 일종의 거대한 착각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완강한 시스템 속에서 고독한 개인들과 더불어 은희경 문학이 다시 시작된다.

2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이것은 푸시킨의 말이다. 그러나 푸시킨이 필요한 때는 이미 늦은 때다. 속지 않기 위해서는 안전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만 지탱돼왔다.”(은희경, 프롤로그, 신의 선물, 문학동네, 1995) 혹여 가까이 오면, 속지 않기 위해 먼저 속여야 한다. “지금보다 훨씬 나쁘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은 거야.”(은희경, 그녀의 세 번째 남자, 타인에게 말 걸기, 문학동네, 1996) 그러나 2007년의 은희경이 당시의 은희경에게 묻는다. 진정한 나라고 믿었던 것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면? 내 영혼의 고향인 이타카가 이미 지도에서 사라져버렸다면? 은희경의 근작들은 느낌표 대신에 물음표들을 몰고 다닌다. 그 의문들이 조금씩 땅을 흔들다가 마침내 나를 관통하고 이타카를 침몰시킨다.

  고독의 발견을 먼저 읽는다. K는 서른여덟 살의 만년 고시생이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자기를 여러 개로 쪼갤 줄도 몰라 삶이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오랫동안 만나왔던 S도 더 이상 그를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서른여덟 번째 생일날 홀로 찻집에 앉아 있었다. 짐 모리슨의 <People are strange>를 듣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가. 그가 깨어난 뒤부터 몽환적인 일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한 사내를 만나 W시의 여관을 소개 받고, W시의 지도를 구입하고, 그곳에 가서 젤소미나라 불리는 난쟁이 여자를 만난다. 그들 덕분에 ,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던 W시의 지도를 구입하고, 그곳에 가서 젤소미나라 불리는 난쟁이 여자를 만난다. 그들 덕분에 ,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던 W시의 지도를 읽듯, 중심이 텅 비어 있던 내 영혼의 지도를 읽어낼 수 있게 된다. 그는 한때나마 전도유망했고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으며 여행지에서도 스스로 물에 뛰어든 그런 인간이 아니다.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었고 모두가 그를 싫어했으며 그가 물에 빠진 건 동료들이 그를 떠밀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S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여자에게도. 가족들과 그리고 어쩌면 세상 모두에. 나는 무엇을 잘못했던 것일까?”(72)

 

그때였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여자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여자의 치맛자락을 붙들었고 그 순간 내 몸도 함께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붉은 먼지로 감싸인 채 멀리 강이 보였으며 배에 가득 찬 손님들, 검은 외투의 남자, 그리고 흰 입김을 날리며 뭔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강을 내려다보는 젊은 날 K의 모습도 보였다. 그렇구나. 나는 중얼거렸다. 몸을 가볍게 만드는 연구가 드디어 완성되었어.(72)

 

이것은 구원인가? 아닐 것이다. K가 자신의 과거를 한눈에 조감하는 이 순간은 K가 사진의 실패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제 영혼의 어두운 페이지들을 다 넘긴 이 순간에 발설되는 완성운운의 말은 그래서 서글픈 역설이다. 이 대목이 환상으로 비약하는 까닭은 이것이 꿈의 끝이기 때문이다. K가 찻집에서 몽환적인 노래를 들으며 잠든 것이 아마도 꿈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홀연히 나타난 사내가 15년 전의 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도, 내게 지도를 판 서점 주인이 내 행선지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도, 젤소미나가 를 구면인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대한 것도, 그들이 다 꿈속의 인물들이자 내 영혼의 기미(機微)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후에야 이 소설은 꿈 이전의 어느 한때로 되돌아간다. “그날은 S의 생일이었다.”(72) 젤소미나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거대한 고독을 발견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오열했던 영화 <>의 잠파노처럼, 그도 제 삶을 관통하고 있는 거대한 고독을 발견하고 그날 소리 없이 오열했다. “내가 남의 눈에 비친 그대로의 사람이라는 사실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68)을 깨닫는 일은 한 개인의 현실을 족히 무너뜨린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들을 수습하고 영혼의 내력을 살피기 위해 슬픈 몽유를 시작한 것은 이 고독의 발견이후의 일이다.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의 구조가 이와 흡사하다. ‘이제 내 인생에 변수는 거의 없다”(188)고 말하는 출판사 사장이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그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에게 ‘1991년의 코스모나츠라는 제목의 소설 원고가 들어오고(나중에 밝혀지지만 이것은 15년 전에 내가 분실한 J의 소설이다>, ‘은숙이라는 여인에게서 정체불명의 메일이 온다(나중에 밝혀지지만 이것은 15년 전 내가 띄운 편지의 답신이다). 고독의 발견에서 정체불명의 사내가 KW시로 안내했듯, 한 편의 소설과 하나의 이름이 그를 15년 전의 한순간으로, 1992년 어느 날의 결혼식 피로연장으로 서서히 데리고 간다. 1992년은 환멸과 허무의 연대였다. 그때 그곳에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제 청춘의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들의 청춘은 끝난 것이었다. 이후 K는 자살했고 M은 이민을 떠났으며 는 그대를 잊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마음속에 파문이 인다. 당신은 어느 우주를 떠돌다가 이제야 그곳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지구로부터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깊은 암흑 한가운데에 홀로 떠있는 가가린은 이미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로부터 이탈해 있었다. 모든 것이 어둡고 가벼워서 거의 허무에 가까웠다. 불안하고 고독했다. 그대에 유리 가가린의 눈앞에 빛을 머금은 행성이 나타났다. 검은 허공으로 가득 찬 우주 한가운데 신비롭게 떠 있는 아름다운 별. 가가린은 전율했다. 나는 저 별을 보기 위해서 우주를 뚫고 그렇게 먼 거리를 가로질러 왔던 것일까.(208~209)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나 잃은 줄 몰랐고 진심으로 고독했으나 고독한 줄 몰랐던 그가 유리 가가린처럼 청춘이라는 푸른 별을 향해 귀환하기 시작한다. “오늘밤의 시간은 내 인생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예외적인 미지의 시간이다.”(210) 15년 만에 되찾은 청춘의 한때가 권태로운 오늘에 빛을 뿌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인가? 역시 아닐 것이다. 외려 우리는 소설의 끝에 놓여 있는 15년 전 의 편지를 읽는 순간 무너질 듯한 애잔함을 느낀다. 15년을 건너뛰는 시적 도약의 순간에 오히려 15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새삼 느끼게 되는 탓이다. 청춘의 기억을 삼키며 처연히 흘러갔을 15년의 세월이 상징하는 것은 삶의 불가항력이다. 고독의 발견의 끝에서야 터져나오는 과거의 오열이 주는 착찹한 감회가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이 소설들에서 인물들의 현재를 가능하게 한 과거의 결정적인 한순간을 소설의 끝에서야 만나게 된다. 이와 같은 배치의 마술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어떤 유무형의 힘 앞에서는 도무지 선택의 왕국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다. 이 모두를 일러 고독의 발견이라 부를 것이다.

 

3

많은 것을 잃어버렸으되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그것은 먹먹한 일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참혹한 일이다. 시간은, 삶은, 시스템은 그렇게 먹먹하고 참혹한 것이라고 은희경의 소설은 말한다. 상처가 켜켜이 쌓여 이제는 영혼이 온통 굳은살로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인물들이 있고, 그들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어떠한 감상의 개입도 없이 옮겨내는 건조한 문장들이 있다. 그것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긴장감은 어떤 소설에서 건 읽는 이의 방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수사학의 소관이 아니다. 초기 소설들이 자유자재로 구사한 파사현정의 수사학이 이데올로기와의 유격전을 위한 것이었다면, 최근 소설들이 채용하고 있는 무색무취의 수사학은 시스템과 주체의 준엄한 대치를 그리기 위한 것이다. 그 수사학의 빈틈없는 긴장감 속에서 문득 재현되는 주체의 어떤 안간힘은 그래서 얼핏 강박증의 양상을 띠면서 마침내는 인간의 존엄을 되새기게 한다. 그 소재가 다이어트 강박이든 지도 중독이든 말이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의 결말 부분이다.

 

내가 이태리 식당에서 지금까지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세계를 보았듯이 아버지 역시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아들을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뚱뚱한 아이의 기억을 갖고 떠나버렸다. 비너스를 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멸시한다고.(113~114)

 

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축복 받지 못한 출생이었기 때문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에 다한 애착은 아름다운 출생에의 꿈이다. 그 인정의 결핍이 를 고독하게 한다. ‘의 거대한 몸집은 저 거대한 고독의 슬픈 은유다. 그래서 아버지의 위독을 통보 받은 서른다섯 번째 생일날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아비가 죽기 전 마지막 한 번만이라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다이어트라는 소재는 방편일 뿐이다. 육체의 질긴 욕망은 삶의 불가항력을, ‘의 필사적인 다이어트는 시스템과 맞서는 고독한 분투를 은유한다. 거대한 고독의 세계에서 의 좌표를 찾겠다는 열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면, 이 다이어트가 그토록 사무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끝내 아름다움은 를 멸시한다. 이 소설은 완강한 시스템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인간의 안간힘에 바치는 비가로 읽힌다. 이 다이어트에 비견되는 것이 소녀 B의 몽상’(날씨와 생활)이다. 그러나 현실은 밀린 할부 책값을 받으러 오는 수금원처럼 나타나 태연하게 그 몽상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러나 상상까지 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140) 소녀는 현실의 사소한 악의에도 쉽게 바스러지고 마는 삶을 웃음으로 견뎌낸다. 그러나 그 웃음은 반어다. 그 웃음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라 해도 생활은 맑을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시스템의 악의에 맞서는 안간힘의 웃음일 것이다.

최근 은희경의 소설들에게 무심하게 나열되는 정보들은 그 안간힘의 무늬를 그려내기 위해 동원된다. ‘가 다이어트에 대한 정보를 소상히 나열할 때, 소녀 B가 온갖 동화책들의 제목을 나열할 때, 그것들은 모두 고독한 인간들의 강박증적인 내면을 우회적으로 재현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좌표를 잃어버린 인간들이 고안해낸 없는 지도의 대체물들일 것이다. 그래서 지도 중독을 마지막으로 잃어야 한다. “좌표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길 찾기가 쉽지 않은 세상”(153)을 사는 인간들의 여행기다. 좌표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두 유형의 인물이 있어 우리의 거울 역할을 한다. M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저 받아들여야만 한다”(152)고 믿는 적응론자. 좌표가 불확실할 때에는 그저 무리에 섞여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타입이라고 해도 좋다. 그가 캐나다 로키 산맥에서 만나게 되는 P는 자신의 좌표를 끊임없이 확인하려고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다. 그의 지도 중독은 좌표를 잃어버린 시대의 한 증상처럼 보인다. 얼핏 사회부적응자”(162)처럼 보이는 그의 강박증은 그러나 길을 찾기 위한 가파른 모색의 소산이다. “나는 남이 안 가본 길을 가는 재미로 살아”(180)라고 말할 때, 혹은 적응만 하면 진화를 할 수 없지”(181)라고 말할 때의 그는 그래서 M과 사뭇 다른 진화론자쯤 될 것이다. 적응론자가 진화론자에게 묻는다.


-선배가 생각하는 진화란 게 뭐예요?

-모두들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진화야. 인간들은 다른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자기와 다른 인간을 배척하게 돼 있어. 하지만 야생에서는 달라야만 서로 존중을 받지. 거기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야. 사는 곳도 다르고 먹이도 다르고 천적도 다르도. 서로 다른 존재들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거야.

-왜 그렇게 지도를 열심히 보세요?

P선배는 피식 웃었다.

-좌표 읽는 것은 내가 풀어본 중에 가장 쉬운 2차방정식이야. 원점 O가 확실하면 P의 위치는 구할 수 있는 법이거든.(181)

 

그저 무리에 섞어 있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 부단히 서로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한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독의 발견 이후에 필요한 것은 고독과의 강인한 대치라는 것이다. P와의 여행을 끝난 후 M이 적응론자의 면모를 얼마간 탈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소설이 P의 진화론을 낭만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일 것이다. P의 강박적인 지도 중독은 그저 또하나의 몸부림일 따른이다. 인용된 대목 이후에 다음 순간 P선배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181)가 기어이 따라붙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좌표 P의 위치를 구한다 한들 갈 길이 환히 보일 리가 있겠는가. MP에서 진실로 우리를 이끌어줄 지도가 필요하다는 착잡한 깨우침 정도만을 얻어냈을 것이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지도를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 없는 지도를 더듬어가는 모색이 인간의 사명이라는 것이 이 신중한 작가의 마지막 한마디가 아닐 것인가. “상투적인 말이긴 해도 어쨌든 인생이란 길 찾기이니까요”(178-179)라는 말은 과연 상투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진실이다. M의 탄식이 그래서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서른이 넘었는데, 나도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183)

어쩌면 이 책은 지도에서 시작해 지도에서 끝난다고 해도 좋아 보인다. 중심에 구멍이 뚫려 있는 W시의 지도와 더불어 고독을 발견하였고(고독의 발견), 캐나다 로키 산맥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갈 길을 물었다(지도 중독). 식품영양학에 관한 사변이 육체의 유전자 지도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때에도(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우연과 필연의 통계학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때에도(의심을 찬양함) 거기에는 지도의 사유라 할 만한 것이 있다.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근저에서 좌우하는 시스템의 내적 논리를 지도로 그려내는 일에서부터 비로소 모종의 전진이 가능할 것이라는 성숙한 구조적 통찰이 이 소설집을 떠받친다. 요컨대 지도라는 메타포 위에 이 책은 서 있다. 지도 메타포의 역사는 유구하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게오르그 루카치, 첫머리, 소설의 이론, 반성완 옮김, 심설당, 1998, 29) 운운한 루카치에서부터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자기-의식”(프레드릭 제임슨, 저자 서문, 지정학적 미학-세계 체제에서의 영화와 공간, 조성훈 옮김, 현대미학사. 2007)의 탈환을 요청하면서 인식적 지도 그리기’(cognitive mapping)의 필요성을 역설한 프레드릭 제임슨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들의 고뇌와 고투는 지금 은희경의 것이기도 하다.

 

4

성실한 작가라면 고뇌할 것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개를 편다는 사상가의 금언과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라는 실천가의 명령 사이에서 고독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는 사상가도 아니고 실천가도 아니다. ‘황혼녘이 되기 전에 날아올라야 하고 로도스레서는 외려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는 사상가보다 빠르고 실천가보다 느리다. 이 성실한 오류와 성숙한 주저가 소설가의 존재 증명이다. 그 자리에 서면 보인다. 시스템의 현황과 우리의 좌표가 쓸쓸하게 일렁인다. 그렇게 떠오르는 기미들로 작가는 지도를 만든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일에 울었고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일에 웃었다고 했던가.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이를테면 그 중간에 서는 일이다. 이제 은희경의 소설을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거대한 고독의 세계에서 인간의 지도를 만드는 이 지도 제작자에게 우리의 갈 길을 묻고만 싶다. 그러나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않기로 작정한 이 소설가에게도 삶은 얼마나 고독한 것일까.

나는 아름답고 낯설고 허망한 소설을 좋아한다. 그러나 잘 쓰지는 못한다. 대개 내 소설은 질문과 고민을 포함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은희경, 작가의 말, 비밀과 거짓말, 문학동네, 2005) 이 말은 믿을 게 못 된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로 말하자면, 질문과 고민이 응축되어 있는 이야기인 채로 아름답고 낯설고(섣부른 전망을 거절한다는 의미에서) 끝내 허망하기까지 하다. 한 단어도 빼놓지 않고 다시 적겠다. 아름답고, 낯설고, 허망하다. 초기 은희경의 소설들을 면도칼 같아서 읽는 중에 여러 번 당신을 긋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것은 기꺼이 즐길 만한 통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소설은 칼이 아닌 척하는 칼이어서 당신은 베이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로 깊이 베이게 될 것이다. 쉽게 알아보기 힘든 어떤 힘이 밀고 들어와, 조용히 빠져나가고, 마침내 피 흐를 때, 비로소 당신은 그것이 칼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면도칼도 못 되는 소설들의 중구난방 속에서 오랜만에 느끼는 묵직한 통증에 경의를 표한다. 이 독창적인 소설미학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나. 이 소설의 장르는 그래서 그냥 은희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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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기 위해 - 퇴근길에 카페에 들르고, 고민하다가 이 책을 꺼내들고, 뒷장을 넘겨보는- 일련의 행동들을 했던 것만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단숨에 내 시각을 돌린 글이다.
좌표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말도, 사람들이 가는 길이 곧 세상의 진리라는 말도 어딘가 탐탁치 않았다.
이 글을 통해, 없는 지도를 찾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중이라고, 이 고단한 삶을 조금이라도 일으킬 힘을 얻게 됐다. 이제서야 은희경 작가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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