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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RY

그림(에 대한) 일기 #1

새벽에 꾼 꿈에서 한 그림이 번쩍 했다가 사라졌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의 느낌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그런 그림이었다. 디테일한 것은 보지 못했지만, 당분간은 그 어렴풋한 느낌을 좇아 그림을 그리게 될 것 같다. 더듬거리며.
그림을 이전보다 더 많이, 진지하게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고보니 확실히 이전에는 무시했거나 몰랐던 어려움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스타일이 없다. 기술의 숙련도가 부족하다, 연출력이 부족하다 등. 요즘 그리고 있는 외주 작업을 보면, 스타일이랄 게 없다. 소설로 치자면 문체일까. 마치 글을 좀 쓰는 사람이 이것 저것 잡문을 뿌리는 것처럼 그림에 나의 개성이 없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입시미술을 하고, 미술대학교에 들어가고, 따지고 보면 아기 때부터 낙서를 했을 테니 정말 30년 동안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그리면 그림에 익숙할 법도 한데, 그게 아니다. 모국어를 30년 동안 배우고 썼지만 정작 끄적거림이 아닌 ‘한 편의 글'을 한 편 쓰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스스로 주제를 찾고 그에 맞는 재료를 선택하고 그림체를 익히는 일련의 과정이 내가 ‘내 그림’을 그려야 함을 자각하는 것이라면 내가 본격적으로 일러스트를 그린 것은 시청 전시를 한 작년 이맘 때다. 그 일 년 동안 는 것이 하나 있다면 지구력이다. 큰 형태, 작은 부분에 대해 ‘이것을 끝까지 그려야 한다’는 의지에 따라, 뭉개지 않고 그려내는 지구력이 생겼음을,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다. 이제 그 외의 남은 모든 부분은 내 노력에 달렸다. 난 이제 나에 대한 어떤 성급한 결론도 짓지 못하겠다. 그림도, 어떤 외부 자극과 스스로의 각성을 통해 최우선 순위에서 2, 3위로 밀려날지 모른다. 그런데 요즘, 그렇게 좋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더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오에 겐자부로의 말에서 다시금 요즘의 내 마음을 읽는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학문에 뜻을 두었던 적이 생애에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지금은 더 확실히 자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요즘 들어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점 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와타나베 가즈오 선생님의 저작을 만나 ‘와타나베 가즈오’라는 커다란 인물을 우러러보며 살아가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지향하는 학문의 방향으로 내가 초보 학자로서 정진해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럴 능력도 인내력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오에 겐자부로’라는 인간을 실현하고 싶다. 그것이 나를 소설가의 길로 서둘러 들어서게 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나를 만들면서도 항상 그 커다란 산을 우러러보며 살 작정이었지요. 더 솔직히 말해서 한 2년간은 “나는 안 돼. 나는 저런 학자의 미니어처도 될 수 없는 인간이야!”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미련도 있어서 대학원에 갈까 말까, 우물쭈물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은근슬쩍 더이상은 유희가 아닌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나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진로를 결정해버리는 습성이 있었고, 또 그런 식의 결정을 반복해 온 인간입니다. 그런 데다가 내가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그것도 주저 없이 합니다. 부득이한 경우라도 용기백배하죠. 어머니한테 받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는 허크가 친구를 배신하지 않으려고 “그럼 좋아. 지옥엔 내가 간다!”고 결심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일종의 제 마음속의 입버릇으로 무엇인가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힘든 쪽을 선택하고는 후회하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았지요. “좋아. 지옥엔 내가 간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큰 나는 소설가가 되려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소설 쓰기에 전념하자, 확실하게 학문 쪽은 단념하기로 결심하고 대학원 진학원서를 철회할 것을...
이쿠타가와 상을 받기는 했지만, 진지하게 장래를 선택했다고 자신할 수 없었어요. 대학을 나와 그대로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믿음직한 생활수단의 확보와는 거리가 먼 듯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단 시작한 이상 아무도 쓰지 못했던 소설을 쓰고 싶은 모험심은 있었어요....그렇게까지 확신에 차서 발을 내딛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시작해보니 소설가로서의 생활이 내 생활의 전부가 되었어요.”

“내 스스로 <기묘한 작업>은 지금까지 장난처럼 쓴 습작하고는 다르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신인작가에게는 그렇게 ‘도약’하는 분기점이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기묘한 작업>을 <<도쿄대학신문>>에서 읽은 문예지 관계자의 주문이 있은 후에, 지금 말한 대로 한 번의 ‘도약’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다른 작품을 써서 편집자에게 건넸습니다. 그러자 다행스럽게도 혜안을 가진 편집자라서 “이건 별로네”라고 말해주더군요. 글을 돌려받아서 다시 읽어보니 스스로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좋지 않다는 것을요. 그 원고를 찢어버렸지만 동시에 ‘그럼 다시 써보자’하는 의욕이 생기더군요. ‘다시 써보자’라고 생각한 시점이, 내가 의식적으로 소설가가 된 첫걸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나는 일찍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젊을 때 이미 많은 작품을 썼지만,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가족들의 비호 속에 자란 늦된 인간이지요. 아역 출신 배우가 성숙한 모습을 보여도 늘 미숙하다는 결점을 지적받는 경우가 있는데, 나에게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늦된 작가이지요. 다만, 늦된 작가는 끊임없이 소설 기법의 완성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지요. 이 점은 스스로도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late work. ‘만년의 작업’에 연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75)

오에 겐자부로,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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